한지민 작가 비평
메탁시의 영토를 꿈꾸는 꿈
이정화
한지민 작가는 작업 안에서 일어나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여 잡아 두었다가 어느 시점, 어떤 생각이나 이야기가 떠오를 때 다시 꺼내어 작업에 흘려보낸다. 이는 작가가 ‘시간에 따른 변화와 상실에 저항하는 나름의 방식이자 지금을 기록하는 방식’이다. 묵혀 둔 이미지를 현재의 작업으로 가져올 때 그의 작품에는 오래된 시간의 힘이 깃든다. 그래서일까. 화면에 드러난 장소는 어떤 ‘태고의 공간’을 연상시키고, 형상들은 기묘한 꿈의 환영 같다. 한지민 작가의 작업에서 상징은 중요한 요소이며, 그중 새의 형상은 개인 토템의 의미를 지닌 중요한 매개체다. < 시가 된 시간 >(2024)에는 마른 풀숲 사이로 모습을 드러내며 어딘가로 향하는 무리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인간의 얼굴 대신 새의 형상을 한 가면을 쓰고 날개를 연상시키는 망토를 두르고 있다. 태양 빛에 풀들은 말라 있고, 무채색의 공간은 어떤 고요한 사막 혹은 평원을 연상시킨다. 새의 형상을 한 이미지는 2012년부터 이어진 작가의 리노컷 작품들에 따로 혹은 함께 등장하는데, 새의 형상뿐 아니라 잎이나 뿌리와 같은 자연물로 얼굴 일부가 덮여 있으며, 어딘가로 무리 지어 가거나, 원형을 이루거나, 부양하는 식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문득 궁금해진다. 이들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제의와 응시, 환유적 사라짐
한지민 작가는 볼록 판화의 기법인 리노컷(Linocut)으로 ‘칼 드로잉’을 연출하는데, 리놀륨판에 연필로 1차 드로잉을 한 후, 조각도를 활용해 세밀한 선들을 추가하거나 겹치게 파내어 2차 드로잉을 완성한다. 조각 선들을 얕고 가늘게 파기 때문에 가늘게 칼질을 하는 과정에서 우연적 선들이 연출되고, 얇게 잉크를 판에 먹여서 찍어 판의 디테일이 나오게 하는 과정이나 풀칠로 콜라주하며 예기치 않은 겹침과 변형이 이루어진다. 작가의 리노컷 작업이 ‘회화적’ 인상을 주는 이유는 이러한 연출에 더하여, 무수한 시간 동안 리놀륨판에 선을 긋는 칼 선의 노동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칼맛’은 그가 들인 시간과 몸, 손끝에서 나온다. < 새벽이 내리는 밤 >(2020)에서는 리노컷을 이용한 ‘소멸법 드로잉’을 보여준다. 판화지 위에 하나의 판으로 판화를 찍은 뒤, 같은 판을 수정하고 찍기를 거듭하며 하나의 원판에 새겨진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소멸해 나가는 이 기법은 원판 한 장으로 변화하는 이미지를 기록한다. 이 기법을 활용한 < 끝의 풍경 >(2022) 역시 머리의 형상은 이미 어둠 속에 잠식한, 한 인물이 서서히 소멸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명료하던 육체는 시간이 지날수록 흰 점, 혹은 흰 빛의 형태로 사라지는데, 그 사라짐은 변형 혹은 이행의 과정으로도 느껴진다.
2023년 개인전 《야생 정원(Wild Garden)》(페이지룸8)에서 작가는 도시에 사는 길고양이, 비둘기, 잡초들과 같은 동식물을 등장시킨다. 동물의 관점에서 볼 때, 인간이 형성한 인공 자연은 생명의 위해를 당할 수 있는 거친 ‘야생 정원’이다. 작가는 이 작업에서 인간이 아니라 동식물에게 주체권을 부여한다. 관람자인 인간이 퍼즐 조각을 맞추듯 동식물을 바라볼 때(< 시선의 기억 1, 2, 3 >, 2023), 그들은 인간이 짠 대상화의 시선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보다 자유롭고 깊은 시선으로 인간을 바라본다. < 햐얀 고양이 정원 >(2023)에서 다리를 모은 채 돌 위에 앉아 있는 고양이의 정면에 펜스가 쳐져 있으나 그곳은 갇힌 공간이 아니다. 그들은 인간의 시선(voir)보다 풍요로운 신전 위에서 우리를 응시(regarder)한다. 작가의 이전 작업에서도 시선은 전치된다. 도시의 철탑은 새가 날아와 앉는 순간, 하늘과 땅 사이의 메신저를 상징하는 솟대의 새 조각상이 되고,(< 밤이 앉은 자리 >, 2020), 창백하게 마른 이파리로 덮인 도시의 철탑 안에서 불상을 본다.(< 5월의 2월 >, 2020) 작가의 세계에서 실체와 허상, 인간과 동식물, 꿈과 현실은 미세한 차이, 틈새로 작용하는 듯하다.
2022년 개인전 《내가 딛고 있는》(안국문화재단ag갤러리)에서 작가는 그해 일어난 많은 사건들을 추모한다. 작가 개인으로는 전세값 폭등 시기에 전세 만기가 도래했고, 사회적으로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해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이태원에서 158명의 사상자가 생기는 참사가 발생했다. < 158개의 헌화 >는 관람객이 현장에 비치된 실크 틀을 이용해 꽃 이미지를 찍어내어 헌화를 하고, 그 자리에 전시된 작품과 교환하는 행위를 통해 그날의 참사를 함께 애도한다. 는 현실의 한 조각을 떼어내어 꿈의 풍경 위에 올려놓는다. ‘떼어낸 현실의 조각은 꿈 위에서 다른 이야기의 가능성’이 된다. 이 작품에도 < 시가 된 시간 >에서 보여준 인물군과 유사해 보이는 무리가 등장하는데 이들은 길게 늘어진 국화 화관을 머리에 인 채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 늘어진 그림자 뒤로 황량한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랫바람이 불어올 듯하다. 세심히 보면 이들의 허리춤에는 노끈으로 핸드폰이 묶여 있다. 우화적으로 보이는 부족민의 허리춤에 매달린 핸드폰은 현실을 깨닫게 해 주는 하나의 장치다. 그들이 매고 다니는 핸드폰은 이미 방전이 된 쓸모없는 고철로, 전쟁터에 떠도는 난민들이 켜지지 않는 핸드폰을 쥐고 망연히 서 있는 장면이 투영되었다. 작가는 꿈속 장면처럼 보이는 토템 이미지 안에 지금의 현실이 나아지기를 바라는 바람, 발 디딜 곳 없는 이 모든 상황이 꿈처럼 흘러가기를 바라는 소망을 투영하며 현실을 애도하고, 나름의 제의를 치른다.
디오티마의 이야기
한지민 작가의 작업에는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 서사에 대한 구체적 기원이나 본질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작가의 언어를 통해 한번 상상해 본다. 어느 < 녘 >(2012), 새벽에 깃들어 < 부리가 된 밤 >(2012), < 꿈속의 시 >(2012)처럼 < 물나비 춤 >(2013)을 추는 그(혹은 그들)은 < 어둠의 찰나 >(2012) 새벽을 밟으며, < 피어나는 꿈의 연기 >(2012) 속에서 < 뿌리 내린 항해 >(2012)를 계속한다. 그 < 아득히 먼 >(2018) 야행이 이어지던 2월 혹은 5월, < 밤이 앉은 자리 >(2020), 끝의 풍경에서 ‘일부는 꿈속에 남아 있고 나머지는 날개가 되어’ < 유랑의 문 >(2018 >이 열린다. 그들은 거친 자연에 살지만 달빛 아래에서 춤을 추고 날갯짓으로 피어나며, 가려진 숨결을 지닌 채 현존한다. 여기에 사는 인간은 자연이라는 대상과 자신을 분리하고 인공의 자연을 조성하지만, 거기에 사는 그들은 모든 생명과 공생하며 자연 안에 자신의 기억과 숨결을 새겨 넣는다. 여기에서의 상징 이미지가 거기에서는 환유 이미지로 스며 새로운 길을 낸다. 작가의 토템 이미지에서 흥미로운 것은 남성 무리로 상징되는 이들은 얼굴에 새의 형상이라든가 잎으로 덮여 있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지만, 여신으로 보이는 여성 이미지들은 얼굴의 형상이나 표정 등을 구체적으로 묘사한 점이다. < 아득히 먼 >에서는 마른 가지가 무성하게 뻗은 거대한 나무 위에 여신들이 날갯짓하며 행렬을 이루고 있다. 그들은 곧 창공을 향해 비상이라도 할 것같이 몸짓이 우아하고 힘차다. < 유랑의 문 >에서는 다섯 명의 나신들이 원을 이루며 앉아 있고 그 사이로 독수리로 보이는 새들이 내려앉아 조화를 이루고 있다. 미소 지으며 모여 앉은 여신들은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플라톤의 『향연』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현자이자 선지자이자 의사인 디오티마라는 여성에게서 가르침을 얻곤 했는데, 이 신비한 스승 디오티마는 다른 세계에 속한 존재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 다른 세계는 ‘사이’(그리스어로는 메탁시(μεταξύ))의 세계로, 이행과 완충의 공간, 세상의 윤곽이 ‘생성 단계에’ 있어서 모든 일이 벌어질 수 있고, 대립의 가치가 서로 배척되지 않으며, 시공간을 초월한 세상들이 존재하는 곳이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이 공간을 ‘메탁시의 영토’로 정의한다.1) 올가는 자신의 책 속 주인공들이 메탁시의 영토에 머물다가 자신의 꿈을 찾아다 준다고 한다. 한지민 작가가 보여주는 토템 이미지와 공간은 올가가 명명한 ‘메탁시의 영토’를 상상하게 한다. 작가의 작품 세계에서는 인간과 동물, 전 생명체가 각자의 지위를 동등하게 부여받고, 디오티마를 닮은 여신들이 모여 있으며, 거대한 나무 위에서 날갯짓하며 항해를 준비한다. 그들은 자연 안에서 일체가 되어 현재의 시간을 리듬에 새긴 채, 불안을 잠재우는 의례를 행한다. 한지민 작가는 조각도로 직조해 낸 풍성하고 새로운 선으로 그 영토의 나무를, 새를, 신화를 새겨 우리에게 이야기 들려준다.
현 세계의 작가는 메탁시의 영토, 모든 것이 일어날 수 있는 영토이자 그렇게 이미 존재했던 영토를 가꾸어 나간다. 이 중간 지대는 예술이 자원을 흡수하여 비축하는 거대하고 강력한 영역이다. 이곳에서 이미지가 생성되고, 은유와 상징이 탄생하며, 이 공간을 통해 우리의 내부는 외부와 접촉할 수 있다. 메탁시의 영토는 세상의 다차원적인 복잡성을 투영하여 모든 것을 단순화하려는 인간의 사고로부터 세상을 보호한다. 세계의 다차원적 의미를 깨닫고 인식할 때 우리는 현실에 막힌 무언가를 본다. 이제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질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새로운 질서가 보이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세상 전체와 놀라운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거대한 단일체로서 세상을 구성하는 일부라는 인식이다. 신화와 전통에 기반을 둔 은유의 세계는 개별적이면서 단절된 우리는 묶어 주는 공통의 토양이다. 메탁시의 영토는 우리가 익히 아는 나무의 집합체로서의 숲과 유사하지만, 보다 광범위하고 강한 유기체로서 생기를 북돋는 수액이 흐르는 거대한 숲과 같다. 그 영토를 어떻게 상상할 수 있을까. 한지민 작가가 보여주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면 된다.
1) 올가 토카르추크, 최성은 옮김, 『다정한 서술자』(민음사, 2022)에서 참조.